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문예마당] ‘부실이’와 어머니

타주로 이사하는 친구가 키우던 산세비에리아 화분 두 개를 주고 갔다. 밤에 호흡하며 산소를 많이 내뿜으니, 실내에 두면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했다. 간혹 꽃을 피워 올리기도 한다는데 꽃대는 흔적도 없고 잎대뿐이었다. 두 화분 중의 하나는 잎이 모두 곧고 키도 가지런했고 나머지 하나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싱싱한 화분을 침실에 들여놓고, 부실한 쪽을 양지바른 거실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부실이’가 놀랍게도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휘어졌던 잎새가 여물어지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윤기를 머금었다. 역시 햇볕은 최고의 자양분인가. 정성을 다해 돌보기 시작했다. 자주 물을 주고 시간 따라, 햇볕의 각도에 맞춰 화분의 방향을 틀어 주자 부실이는 하루가 다르게 움쑥 자라며 모양을 냈다.     한 달 후에 분갈이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동안 키가 조금밖에 크지 않은 튼실이의 뿌리는 단단한데, 부실이는 잎대만 무성할 뿐 뿌리는 거의 썩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까맣게 모르다니! 지나친 햇볕과 감당할 수 없는 물공급이 부실이를 뿌리부터 상하게 한 것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쓰러지셨다. 그때까지 자식들은 깊이 감춰진 어머니의 연약함을 모르고 건강한 젊은 날의 어머니로만 생각했다. 딸만 다섯을 둔 어머니의 한과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포장했던 어머니의 가슴 속 서러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늙어도 딸들 신세는 안 진다”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혼자가 되었지만 어느 딸도 어머니를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부모의 나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때의 어머니의 외로움을 지금 비로소 절절히 느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외출하시는 날은 온종일 쓸쓸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골목을 돌아 점점 작아지고 세모시 옥색 치맛자락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에 오실 즈음이 되면,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 뜰이 내려다보이는 창경궁 담장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불렀다.     “임자 없는 대궐 안에 무궁화는 피고 또 피어~~” 어머니가 안 계신 집안은 내겐 망국(亡國)의 대궐처럼 휑한 빈터였다. 노래 부르기도 지친 아슴푸레한 저녁 무렵이 되어 날 찾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면 구르듯 달려 내려가 어머니에게 안겼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군사정권에서는 그해 대학 졸업 예정자들에게 학사 고시라는 것을 실시했다. 대학 졸업 자격시험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에 시험이 있었다. 입학시험처럼 여러 과목에 걸친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데 교문 밖에 뜻밖에도 어머니가 와 계셨다. 교정에서 친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급히 어머니의 팔을 잡아끌며 짜증을 부렸다.     “엄만, 뭐 하러 오셨어요?”     “우리 딸이 국가고시를 보는데 엄마가 와야지.”     그날 교문 밖 찬바람 속에 어머니는 시험이 끝나도록 오래 서 계셨다. 그 바람은 지난 22년 동안 내가 크고 작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어머니가 맞으시던 바람이다. 마지막이 된 칼바람 속의 어머니를 뿌리쳤던 그날의 기억이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다.   유학길에 오르며 처음으로 어머니 품을 떠났다. 학교 기숙사 창문으로 샌타모니카 해변이 보였다. 어스름 녘이면 해변으로 달려가서 먼바다 끝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 바다는 부산에 계신 어머니의 바다와 이어져 있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나갔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파도를 따라 내 마음도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달무리 지는 저녁이면 파도는 엄청난 기세로 해안을 향해 달려오다가 흰 거품이 되어 스러지곤 했다. 그래도 파도는 어머니처럼 내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저만치 다가왔다가 미진하게 바다로 밀려나가는가 하면 때로는 발밑까지 치고 올라와 차디찬 각성으로 나를 흔들었다. 그럴 때면 서둘러 일어나 모래를 털고 학교로 돌아갔다.   결혼 5년 만에 어머니를 미국에 초청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66번 국도가에는 노란 들꽃들이 내 마음처럼 바람에 설레고 있었다. 짙은 물빛 원피스를 입고 세인트루이스 공항에 내린 어머니는 출구로 걸어 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셋째 딸과 처음 만나는 딸 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집까지 두 시간 넘어 달리는 동안에도 어머니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까르륵 애교가 넘치는 세 살이 된 손자의 재롱에 푹 빠지셨고 카시트에서 말없이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는 돌배기 손녀와 눈이 마주치면, 어머니와 띠동갑 손녀라며 귀여워하셨다.   집에서 어머니는 늘 성경을 보셨는데, 남편은 퇴근해서 집에 오면 짐짓 눈을 크게 뜨고, “아니 어머니, 그 책 아직도 다 못 읽으셨어요?” 하며 놀란 시늉을 해서 어머니를 뒤로 넘어가게 했다.     남편이 재직하던 미주리 대학은 오자크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도심 곳곳에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자갈 개울들을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도시에 있었다.     개울물에 발을 담그며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지낸 두 달이 결혼 후, 어머니와 가장 오래 보낸 시간이었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머니가 유독 그립다. 유니스 박 / 수필가문예마당 어머니 부실 어머니 목소리 어머니 얼굴 대학 졸업

2025-06-05

[이아침에] 가장 행복한 날

몇 해째 이어지던 소송에 지쳐 있을 때였다. 삶은 고달프고 하루하루는 메말랐다. 오로지 견뎌내야 한다는 일념에 매달려 안간힘을 쏟을 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여 단골 레스토랑에서 나누던 브런치도 어느새 먼 기억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 가서 다시 시작하리라 막연히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늘 가던 맥도널드 대신 새로 문을 연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신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물으셨다. “언제 이런 멋진 곳을 알아두었니?”     어머니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가 내 마음결에 밀려들어와 속삭이듯 일깨웠다. 어떤 형편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가족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어머니는 초록의 새순을 피워내는 봄 나무 같으셨다. 인고의 겨울을 잠잠히 견디며,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감싸주셨다.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시며  밝은 미소를 지으셨고, 말끝에 머무는 미소는 봄 햇살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그 미소를, 나는 너무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말,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머니, 두 아들, 며느리, 손주들, 그리고 나.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누는 식사는 묵혀 두었던 단란함을  모처럼  맛보게 했다. 식탁 위로 흐르는  웃음소리가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새롭게 얹히는 기쁨의 선율 같았다. 우리는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을 ‘가족이 함께하는 날’로 정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가족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이야.”     그러곤 가는 길에 99센트 스토어에 들르자고 하셨다. 하얀 플라스틱 공을  집어들고  “이거 사도 될까”. 머뭇거리듯 한 어머니의 물음 속에, 그나마도 주저하는 애틋한 염려가 묻어 나왔다. 목이 메었다. “갖고 싶은 건 다 사세요”라 툭 던지듯 말했지만, 목울대 너머로 울컥함이 밀려와 시선을 돌렸다.   다음날, 어머니 집 장식장 한켠에 놓인 하얀 공을 보았다. ‘별것 아닌 걸…’하는 표정을 짓자,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공으로 놀면 운동도 되고, 저기 두고 바라보는 재미도 있어”. 그렇게 보니 조명 아래 은은한 형광 빛을 머금은 공이 둥근 달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 달 후, 두 번째 가족 브런치를 앞두고 어머니는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유품을 정리하던 날, 장식장 한가운데 놓인 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버리려다 문득 공 한쪽에 적힌 글귀를 발견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우리 가족 함께하는 날. 나의 가장 행복한 날.’ 그 곁에는 정성스럽게 그려진 한 다발의 꽃.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함께하는 날이었다. 어머니의 행복이 너무 소박해서, 그래서 더 가슴이 메어졌다.   지금, 그 공은 내 장식장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옆에는 환하게 웃고 계신 어머니의 사진이 자리한다. 미소 너머로 어머니가 남기신 말들 속에 심겨 있던 행복을 되새겨 본다. 어머니가 일상의 삶으로 보여주신 행복을 지켜가고 싶다. 작은 행복이지만, 가장 큰 행복이다.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행복 어머니 얼굴 가족 브런치 다음날 어머니

2025-05-0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